각고의 노력 끝에 대학을 마치자마자 공립고등학교의 정교사가 되었지만, 무한히 반복되기만 하는 것 같은 학교생활의 권태로움을 견디지 못해 두 해 만에 교사 생활을 그만둔 주인공 「여자」는 이제 곧 서른 살을 맞이한다. 어릴 적부터 염원했던 교사라는 직업을 내려놓기는 했지만, 온건하고 성실한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으며 지방 신도시의 외곽지구에 일평생 자신들의 보금자리가 될 세련되고 아늑한 단독주택도 한 채 마련했다. 이제 여자는 출산을 계획하고 준비 중이며, 모든 일상은 순조롭고 평화롭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여자 자신의 삶이란 행복의 추구였다기보다 그저 불행으로부터의 도피였는지도 모른다. 최고의 소프라노가 되리라는 포부로 음대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사업 실패와 죽음으로 졸지에 성매매 업소의 윤락녀가 되어버린 친구. 무슨 이유에서 인지 한글을 깨치지 못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과 비행만을 일삼다 끝내 가족들과 소식이 영영 끊어져 버린 작은 오빠. 학부 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자신만의 역사서를 두 권이나 집필해 낼 만큼 특출한 재능을 가진 역사학도였지만,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린 여동생의 산업재해 인정을 받아내기 위해 회사를 상대로 투쟁을 벌이다 끝내 무명의 사회운동가로 요절해 버린 첫사랑…. 이십 대를 지나오는 동안 여자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불행의 나락으로 내몰리는 모습을 늘 지켜보아야만 했고, 운명의 무자비한 힘 앞에서 인간의 의지란 얼마나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해야 했었다.
여자의 집안은 유서 깊은 목회자 가문으로서, 사후에 건국훈장이 수여된 여자의 증조부는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명령을 마지막까지 거부했던 순교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성장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 가는 그 실존적 과정을 체험하는 동안 여자는 자신이 교육받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윤리관에 대한 본질적인 회의에 함몰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여자로 하여금 점점 더 깊은 고립감과 우울함에 빠져들게 했었다.
하지만 그 고뇌의 시간은 이제 과거일 뿐이다. 삶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불가항력적인 사태일 뿐, 의지나 선택의 소산은 아니기 때문이며, 어차피 각자에게 주어진 삶에 타인이 개입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여자에게 남은 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안락한 환경을 남편과 함께 잘 지켜 나가는 것,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삶을 성실히 마쳐 나가는 것, 외부의 어떤 미혹이나 압력에도 동요하지 않고 서로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 오직 그것 뿐인 것이다. 또 그럴 수 있으리라 믿기에 여자는 오늘도 평온한 일상을 차분히 영위해 나간다….
그런 여자의 앞에 어느날 문득 나타난 한 남자…. 커다란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는 그 남자는 몇 해 전 여자가 근무했던 학교의 학생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잘 기억해 내지 못하고, 그 우연한 만남 이후로 남자는 여자의 집 주변을 까닭없이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 커다란 모터사이클의 불길한 굉음과 함께…. 그리고 시작되는 사소하지만, 의심스러운 남편의 행동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한 여자는 남자가 자기 집 주변을 배회하는 까닭을 알아내기 위해 남자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파멸」을 경고한다. 봄이 되면 남편과 함께 떠나기로 했던 몽골의 홉스굴 호수 여행의 항공권이 도착하던 날, 여자의 집에는 한 방의 총성이 울리고 현행범으로 체포된 여자는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칠 년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대학, 취업, 연애, 결혼, 자녀 교육 그리고 노후 준비에 이르기까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정해져 있는 삶의 끝없는 일정들과 그런 행복의 조건을 하자 없이 취득해 내기 위한 소리 없는 투쟁들…. 이 소설은 어째서 삶은 인간에게 행복을 위해 행복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며 인간은 왜 삶의 그러한 부조리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 고찰이다.
1980년 부산 출생.
쇠얀 키에르케고어의 영향을 받았으며 주로 운명과 의지라는 고전적 주제를 현상학적으로 탐구했다.
지금은 신비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양자역학적 존재론을 탐구 중이다.